저자: 이미숙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객원연구원)

일본의 대표적인 고소설인 『겐지 모노가타리(源氏物語)』(1008년경) 「에아와세(繪 合)」 권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어떠한 예능이든 열중하지 않고는 배울 수 있는 방도가 없지만, 제각각의 길에 스승이 있고 배울 만한 바가 있다면 그 깊이가 깊은지 얕은지는 모르겠지만, 자연스레 배운바 그 자취가 있을 것입니다. 붓을 드는 길과 바둑을 두는 일이야말로 이상하게도 타고난 재능의 깊이가 보입니다. 깊이 노력하지 않은 듯이 보이는 어리석은 자라도 그럴 만하여 그림을 그리고 바둑을 두는 예 또한 나옵니다. 명문가 자제 중에는 역시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사람이 무엇이든 좋아하며 터득한 듯이 보입니다. 상황의 안전에서 친왕들, 내친왕(內親王) 누가 이런저런 다양한 예능을 배우지 않으셨겠는지요. 그중에서도 특히 마음을 다하셔서 솜씨를 이어받으신 보람이 있어, 문 재(文才)는 더 말할 나위 없고 그 이외의 것 중에서는 칠현금 타시는 것이 으뜸가는 재능이시고, 다음으로는 횡적, 비파, 쟁금을 잇따라 배우신다고 주상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무라사키시키부 지음, 이미숙 주해, 2017: 447)

남자 주인공인 히카루겐지(光源氏)의 문학적 재능과 다양한 예술적 재능을 기술하는 이 대목에서 눈에 띄는 것은 히카루겐지가 다른 악기와 더불어 비파(琵 琶)라는 현악기를 배웠으며 조예가 깊다는 점이다. 4현금인 비파는 한국, 중국, 일본에서 모두 타는 악기이지만 페르시아·아라비아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일본에는 인도와 서역(西域) 1·중국을 거쳐 나라시대(奈良時代, 710~794)에 들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근거로 들 수 있는 것이 바로 나라(奈良) 도다이지(東大寺) ‘쇼 소인(正倉院)’에 보관되어 있는 ‘나전자단오현비파(螺銓紫檀五絃琵琶)’의 존재이다. 현존하는 유일한 5현 비파이며 표면에 그려진 낙타에 탄 페르시아 사람으로 보이는 인물이 비파를 연주하는 이국적인 모습에서 이 비파의 국제적인 성격과 더 불어 일본에 유입된 페르시아 문물의 실체를 엿볼 수 있다. 또한 『겐지 모노가 타리』의 시대적인 배경이 10세기 중반의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794~1192)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일본에 들어온 비파는 200년의 세월을 거치며 천황가 사람들이 익혀야 하는 교양의 하나로 일본문화에 스며들어 정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