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김지희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문헌 자료는 역사를 복원하는 가장 기본적인 도구이지만, 동시에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사료를 저술한 역사가가 사건을 각색 혹은 윤색하여 사실을 호도할 가능성이 상존하며, 문헌에 기록되는 것은 일상의 모습이 아니라 특수한 사건이기 때문에 선별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송기호, 2017: 2). 이에 더하여 고대사로 갈수록 문헌 자료 자체가 극소하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고대사에서 절대적으로 부족한 문헌 사료를 보완해 주는 것이 고고학 발굴 성과라고 할 수 있는데, 본 논문에서는 1세기 초 한반도와 중국과의 관계를 문헌과 왕망전(王莽錢)이라는 고고학적 유물로 해명해 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1세기 초 동아시아의 관계가 흉노(匈奴), 왕망(王莽)의 신(新), 고구려(高句麗), 낙랑군(樂浪郡), 그리고 한반도 남부의 정치체(polity)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얽혀 있었기 때문에 동아시아 국제관계사라는 개념으로 이해해야 함을 확인하고자 한다.

고대국가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국가 간 교류(交流)의 중요성은 부연할 필요가 없다. 병존하던 각종 정치체들과 상쟁해야 했던 고대국가의 형성과정에서 확장의 주요 동력은 핵심 자원들의 장악과 운송에 있었다는 지적은 유의미하다(劉莉·陳星燦, 2006: 148). 국가 성립의 기초가 되는 핵심 자원의 교류는 초기 정치집단의 통제 아래 보장되는 안정성의 확보로 가능했으며(Polanyi, 1963: 30), 이는 역으로 자원 및 물품의 확보와 재분배의 주체인 중앙집권화된 정치체의 탄생과 유지에도 영향을 미쳤다. 국가 혹은 정치체별로 처한 환경조건이 다르며 기술 수준의 격차가 존재하고, 자원과 재화는 한정된 지역에서 산출된다는 희소성을 그 특징으로 가진다. 국가 간의 교류는 이러한 문제점을 평화적으로 해소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국가의 형성뿐만 아니라 그 유지와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대 사회를 연구할 때 이를 순수한 형태의 경제적 교류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물론 그 구체적인 양상은 시기와 지역별로 다르게 나타났을 것이지만, 오늘날의 시각에서 유사해 보이더라도 그것은 당대에 다른 의미일 수있다. 즉, 고대 사회에 있어서 순수한 의미의 경제적 교류를 상정하기 어렵다는 점이다(김창석, 2013: 4-5). 본고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화폐 역시 흔히 교역의 산물 혹은 매개로서 인식되지만, 고대 사회에서는 정치적·외교적 욕구의 결과일 수 있다. 서로 다른 정치체의 교류는 현대적 관점에서 볼 때 전혀 경제적이지 않을 수 있으며, 오히려 정치적·외교적 목적이 주가 되고 경제적 이득이 부가 되는 양상이 왕왕 확인된다. 이러한 점에서 교역의 제1증거라 할 수 있는 화폐 역시 동아시아의 정치적·외교적 역학관계, 더 나아가 고대적 관점에서의 해석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