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후 동북아에서는 냉전과 함께 많은 변화가 생겼다. 가장 큰 변화는 미국이 자유 진영을 지키기 위해 공산세력 봉쇄를 미국 외교의 우선 목표로 설정했고(마상윤, 2019: 316) 냉전기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은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본 연구의 주제는 샌프란시스코 체제 속에서 발생한 1959년 초기 재일조선인 북한송환(북송, 北送)에서 나타난 미국의 입장 변화이다. 우선 ‘재일조선인’과 ‘북송’이라는 용어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재일조선인 또는 재일조선인은 ‘1945년 이전 일본 태평양 전쟁 이전에 일본의 식민지 지배의 결과로 일본에 있게 된 자 및 그 자손’을 말한다. 재일조선인 북송문제에 대한 호칭은 연구자들마다 차이가 있다. 테사 모리스 스즈키는 재일조선인 북송을 ‘The repatriation of Koreans from Japan to North Korea’ 등으로 표현하였다(Tessa Morris-Suzuki, 2007: 13). 이현진에 의하면 재일교포, 재일한국인, 재일조선인, 재일동포 등 다양하게 사용되지만, 일본 거주 한국인들에 대해 국적이라는 측면에서 남북한을 포괄하고 역사성을 고려한 용어로 ‘재일조선인’이 주로 사용된다고 하였다고 제시하였다(이현진, 2010: 71 각주 1). 미즈노 나오키(水野直樹)와 문경수의 연구는 오늘날에 ‘재일한국인’, ‘재일조선인’, ‘재일 코리안’ 등의 호칭이 사용되는 이유가 남북 분단이라는 상황에서 민족 호칭에 대한 갈등을 나타내거나 혹은 반대로 분단 극복의 의미가 있다고 보았다(미즈노 나오키·문경수, 2016: 11). 또한, 신소정은 재일조선인들의 투쟁 과정을 성찰하는 의미로 ‘재일조선인’이라는 용어를 설명하였다(신소정, 2021: 3102 각주 1). 본 논문도 남북한의 갈등이 아닌 통합의 의미로 재일조선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북송’이라는 용어도 각 국가와 각 연구자에 따라 다르게 사용된다. 한국에서는 기본적으로 ‘북한송환’, 즉 ‘북송’이라고 많이 쓰이지만, 일본에서는 ‘귀국사업’이라는 용어가 주로 사용된다. 또한, 미국 등에서는 주로 ‘송환(repatriation)’이라 사용된다(이현진, 2010: 71-72 각주 1). 본 논문도 한국 외교문서에서 많이 사용되는 ‘북한송환(북송)’이라는 용어를 활용한다.
그러므로 본 논문에서 ‘재일조선인 북한송환(재일조선인 북송)’은 1959년 재일조선인이 북한으로 귀환한 것을 뜻한다. 재일조선인 북송은 1959년 8월 인도의 캘커타에서 북한적십자사와 일본적십자사가 ‘재일조선인 귀국협정’에 조인한후 1959년 12월 14일에 시작되어 1984년까지 약 9만 명의 재일조선인이 북한으로 영구 귀국한 사건을 의미한다. 이 북송사례는 한국, 일본, 북한 등 국가 행위자 이외에도 국제적십자위원회 등 국가가 아닌 다른 행위자들도 관련되어 있다. 특히 미국도 당시 동북아의 중요 행위자였으므로 북송에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본 연구는 1959년 북송 초기 과정에서 중립을 지키는 것처럼 보인 미국의 실제적인 방침 변화와 그 원인을 살펴본다.
1950년대 후반 한국은 한국전쟁으로 파괴된 국가 경제의 부활을 위한 원조 획득을 위해 한일관계를 재정립하려고 했다. 그러나 제4차 한일회담 재개 후 북송문제로 인하여 한일회담은 냉각상태에 빠졌다. 특히 이 시기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반일주의와 반공의식이 나타났다. 한편 북송문제가 표면에 떠오르기 시작했던 시기 미국의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 행정부는 1950년대 후반 대한 경제원조의 삭감, 일본과의 협력관계 수립을 기대하였다(李鍾元, 1996: 282-284). 당시 일본의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정권은 미일 안보관계와 주일미군에 대해 일본의 주체적 판단을 내세우고자 하였다. 기시 정권은 유엔을 중시하여 유엔을 미일 안보관계의 상위에 두었다(소에야 요시히데, 2006: 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