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필(直筆)’의 이상 혹은 ‘직서(直書)’의 정신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하 『실록』)1의 서술 및 편찬의 주요한 원칙으로 이해되어 왔다. 당대의 사관(史官)들이 실제로 ‘직필’의 정신에 투철했는가에 대해서는 연구자들의 견해가 엇갈린다. 그러나 『실록』이 “전통적인 직필의 이상과 기대를 받”(오항녕, 2018a: 199)았다는 점에 대해서는 학계 내의 대체적인 합의가 있다. 실제로 “사관의 직임은 직필”이라거나 “사관은 마땅히 직필해야 한다”는 등의 언명을 『실록』에서 빈번하게 발견할 수 있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당대인들도 ‘직필’을 사관들이 도달해야 마땅한 규범적 이상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직필’이란 무엇인가. 그것의 의미에 대한 이해는 『실록』을 해석하는데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기에 실로 중요하다. 일례로 차용걸(1979)은 일찍이 ‘직필’의 원칙에 주목하여 “직필의식(直筆意識)”이란 “사관이 자신이 직접 목격한 시대를 어떤 가치 기준을 가지고 단적으로 평하지 못하고”(차용걸, 1979: 152) “후대에 사실 대로를 그대로 전하여 후인들의 판단에 남기겠다는 정신”(차용걸, 1979: 189)이라고 이해했다. 또한 조선 전기의 『실록』들은 이러한 ‘직필’의 이상에 상대적으로 충실했기에 “사실의 완전한 전달과 보존”(차용걸, 1979: 188)에 성공했다고 평가했다. 요컨대, 그는 ‘직필’의 원칙이 사관의 주관을 배제하고 목전의 사건을‘사실대로 기록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한 결과, 그것을 준수했다고 보이는 기록들을 당대의 사실에 대한 정확한 기록으로 간주하는 데에 이르렀다.
여러 연구자들은 ‘직필’의 의미에 대한 차용걸의 이해를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채택해 왔다. 심지어는 『실록』을 당대에 대한 정확한 기록으로 간주하는 것에 반대하는 연구자조차도 그 이유로 사관들이 ‘사실대로 기록하는 것’으로서의 ‘직필’에 실패했다는 점을 꼽았다. 예컨대, 김경수(2002)는 왕대별 개별 『실록』들을 “편찬 시기의 시대 정신을 그대로 반영”한 결과물로 독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실록』에 수록된 당대사는 조선의 현대사”였기에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간섭하여 사관들의 “곡필(曲筆)의 개연성”을 높였기 때문이다(김경수, 2002: 39-40). 이때 그가 이야기하는 “곡필”이란 ‘직필’의 반대말로, 사관들이“견문한 바를 사초로 작성하려는 철저한 기록 정신”(김경수, 2002: 6)에 투철하지 못한 결과이자 “객관적으로 역사 사실을 기록”(김경수, 2002: 39)하는 데에 실패한 결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