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에서는 1941년 7월, 미국에 의한 대일 자산동결이 이루어지고 그것이 전면적 금수 조치로 확정되기까지의 과정을 재검토하고, 대일 석유 수출에 대한 미국 정부 지도자들의 견해를 다시 읽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과연 통설 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정책 결정과 실행 사이에 괴리가 존재했는지를 판단해 볼 것이다.
이에 더해, 일본에 대한 석유 금수 조치가 제대로 시행되기 위해서는, 미국 한 국가만의 수출 제한 조치로는 충분치 않고, 영국과 네덜란드령 동인도 등 다른 산유국들의 협조가 필요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들 국가들 간에 어떠한 논의를 거쳐 일본에 대한 공동 금수 조치가 취해질 수 있었는지, 그 과정에 대한 충분한 검토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석유 금수 조치라는 일본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올 가능성이 높은 경제 제재가 어떻게 시행되어 갔는지를 살피고, 그러한 제재의 시행이 지니는 정치적·외교적 의미에 관해 논의해 보고자 한다.
대일 자산 동결조치가 대일 금수 조치로 확정되기까지는, 대략 2개월에 걸친 점진적인 정책의 진전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미국의 주도하에, 영국과 네덜란드라는 두 동맹국과 긴밀한 협의를 통해 진행되었다. 이처럼 일본에 대한 경제 제재가 점진적인 과정을 거쳐야 했던 이유는, 급격한 석유 금수조치가 가져올 일본의 반발을 우려한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이유였을 것이다. 애치슨을 비롯한 미국 내 정책 집행자들은, 경제 제재에 대한 일본의 반응을 조심스레 살피고, 경제 제재에 필수적인 동맹국의 협력을 얻기 위한 노력을 충분히 기울이면서 조심스레 석유 금수 조치라는 정책적 목표로 나아갔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통설과는 달리 루즈벨트 대통령과 헐 국무장관 등 정책 결정자들의 의향이 실제정책 집행 과정에서 완전히 무시되기보다는, 이러한 점진적인 과정에 대해 간접적, 혹은 묵시적인 지지를 보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1941년 7월 말, 일본의 남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점령에 의해 시행된 미국 주도의 석유 금수 조치는, 미국 정부내 정책 결정자들이 의도하지 않은 우연의 산물로서 이해되기 보다는, 오랜 기간에 걸쳐 미 정부 내에서 논의되고, 영국, 네덜란드 등 주변국과의 충분한 협의 끝에 탄생한 국제적·국내적 합의의 결과로 이해하는 것이 역사적 사실에 좀 더 부합하는 해석일 것이다. 이러한 해석을 통해 1941년 8월 영국과 미국이 합의한 세계 전략이 지니는 의미와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미국의 참전 결정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를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시아 태평양 전쟁 개전 직전, 미국과 일본 양국이 지닌 입장의 차이는 외교적 노력을 통해 해소될 수 없는 것이었고, 이는 본질적으로 양국이 그리는 동아시아 질서가 상충하는 것이었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