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정근식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사회학과)

2014년은 갑오년이다. 한국인들에게 갑오년은 압도적으로 120년 전인 1894년으로 각인되어 있다. 이 해에 일어났던 농민혁명 때문이다. 이 대사건은 발발 당시에는 동학란으로 불렸지만, 근래에는 발생한 해에 초점을 맞추어 ‘갑오’농민혁명으로 불리기도 하고, 주체에 초점을 맞추어 ‘동학’농민혁명으로 불리고 있다. 명칭의 혼란만큼이나 이 사건을 기억하는 방식도 달라져 왔고, 또한 사건의 전체상 또한 분명하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도 그때 정부군과 일본군에 의해 처참하게 죽어갔던 농민군들이 도대체 몇 명이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고, 청과 일본의 전쟁의 와중에서 동원된 조선인들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한다.

중국인들에게도 갑오년은 매우 특별한 해로 기억되고 있다, 중국에서 이 사건은 갑오중일전쟁으로 규정되어 있고, 이를 기념하는 박물관이 중국의 웨이하이(威海)에 있다. 그것의 명칭은 중국갑오전쟁박물관이다. 중국 정부는 1982년 일본의 교과서 사건을 계기로 항일전쟁과 관련된 지방 곳곳에 박물관을 세우고 역사 교육을 시작했는데, 뤼순의 일아(日俄)감옥 구지(舊址)박물관, 센양(瀋陽)의9·18역사박물관, 베이징(北京) 교외 노구교의 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 난징(南京)의 난징대학살박물관, 하얼빈의 7·31기념관 등과 함께 이 갑오전쟁박물관이 설립되었다. 이 중국갑오전쟁박물관은 1894년이 한국인들 못지않게 중국인들에게도 뼈아픈 치욕의 해로 각인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민족사적 대사건으로서의 동학농민혁명과 동아시아 지역사의 대사건으로서의 청일전쟁은 어떻게 재현되고 있는가? 오늘날 한국의 학계나 시민사회에서는 이들을 별개의 사건으로 인식하는 입장과 통합적으로 인식하는 입장으로 나뉘어져 있지만, 전자가 주류적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한국 정읍에 있는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은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청일전쟁의 진행과정을 보여주지 않는다. 서울의 전쟁기념관조차 청일전쟁을 독립적인 전시항목에서 제외하고 있다. 왜 이런 인식이 일반화되었는가?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은 동심원을 그리는 하나의 사건이지만, 혹시 청일전쟁이라는 이름 때문에 마치 한국과 무관한 사건인 것처럼 오인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