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동아시아의 서양음악 수용은 상하이, 하얼빈, 도쿄, 오사카, 베이징, 타이베이, 경성, 신경 등과 같은 대도시 중심이었다. 상하이와 함께 비아시아인 중심의 유명 오케스트라가 있었던 국제도시는 하얼빈이었다. 상하이에는 오케스트라를 도시 문화의 중요한 요소로 여기는 영국인, 프랑스인, 미국인 등의 서구인 청중이 있었다면, 하얼빈에는 러시아인 중심의 ‘하얼빈교향악단’이 활동하고 있어서 ‘상하이오케스트라’와 쌍벽을 이루었다.
다른 한편, 1926년 도쿄에서 고노에 히데마로(近衛秀麿)에 의해 조직된 ‘뉴심포 니오케스트라’는 동아시아 역사상 처음으로 동아시아인(일본인) 중심의 전문 오케스트라라고 할 수 있다. 1936년 독일음악가 요제프 로젠슈토크(Joseph Rosenstock)가 정식으로 지휘자로 취임한 이후 뉴심포니오케스트라는 일본제국의 대 표 관현악단으로 점차 자리를 다지게 되었다(NHK交響楽協會, 1967: 50-51).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39년은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 교향악단 역사에서 중요한 해이다. 하얼빈교향악단의 일본투어(3월)가 있었고, 일본의 뉴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첫 해외투어로 경성연주회(6월)를 개최한 특별한 해이다. 한반도 의 관점에서 보면, 역사상 처음으로 외국 전문오케스트라가 경성에서 연주하는 사건이 있었던 해이다. 평화로운 시기에도 없었던 두 교향악단의 연주여행이 전쟁 중 한꺼번에 이루어졌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본 논문에서는 (지면상의 문제로 뉴심포니오케스트라의 연주여행은 추후에 밝히고) 지금까지 국내 음악학계에 전모가 소개되지 않은 하얼빈교향악단의 연주여행만 자세하게 다루고자 한다. 특히 중일전쟁 중에 하얼빈교향악단의 연주여행이 가지는 의미와 일본평론가들의 혹평과 그 배경, 교향악단이 부재했던 경성의 음악계에 미친 영향을 분석하여, 교향악단과 교향악이 전쟁 중에 어떠한 문화·정치적 위상을 가졌는지 밝혀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