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대한 미국인들의 관점은 지난 150년간 상당히 일관적이었다. “난학(蘭學)”과 더불어 수 세기 동안 일본에 퍼져나갔던 서구의 다른 요소들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미국인들은 1853년 이전에는 일본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었다. 하지만 매슈 페리(Matthew Perry) 제독의 “흑선(黑船)”이 도래한 이후로 일본인들은 미국인들에게 잇달아 놀라움을 자아냈다. (아마도 중국인들에 대해 짐작했던 것처럼) “나태하고 굼뜬” 동양인이 아니라 “깨끗하고” 근면한 동양인들이 여기 있었고, 그들은 허송세월하는 대신 비약적으로 전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급속 혁명”을 거친 이후, 아시아에서 가장 고립되고, 배타적이고, 경직적이며 보수적이었던 국가는 하루아침에 “가장 활동적이고 진취적인” 국가가 되었다. 미국인 헨리 M. 필드가1877년에 내린 이러한 평가(Iriye, 1972: 13-14; Field를 재인용)는 페리 이후 미국인들의 대체적인 견해가 되었다. “일본인들은 다르다. 그들은 놀랍다. 그들은 특별하다. 그들은 대단하다. 그리고 그들은 위험하다.”
그리고 거의 그 다음 한 세기 동안, 진주만 공습이 일어났을 때까지 미-일 관계는 호감과 더불어 전쟁의 징후가 공존하는 모습을 보였다. 페리 제독이 덴노에게 전달했던 밀러드 필모어(Millard Fillmore) 대통령의 친서는 의미심장한 문장으로 시작되었다. “이제 미합중국은 한 대양에서 또 다른 대양에 걸쳐 있음을 아실 것입니다.”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1854년 두 번째 방문에 페리 제독은 무력을 사용하겠다고 위협했다. 직전 전쟁에서 미군이 멕시코의 수도를 점령했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페리 제독은 “상황에 따라서는 귀국 또한 유사한 곤경에 처할 수 있다”고 했다. 마침내, 1854년 3월 31일 페리는 이른바 “수호통상”협약이라고 일컫는 가나가와조약(神奈川条約)을 맺는 데 성공했다(Bryant, 1947: 277-79; Perry, 1856: 235, 2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