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에게 가장 절박한 것은 현실 삶의 문제이다. 그러나 여기에 대하여 약간의 지적인 간격을 두고 생각한다면, 이 현실은 일정한 지평 속에서 구성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문제를 보다 개념적으로 그리고 보다 넓은 관점에서 파악하려고 할 때, 이것을 분명하게 하는 것은 특히 중요하다. 그러나 이 현실의 문제와 개념적 이해의 바탕이 되는 지평은, 무의식의 원형과 같아서, 쉽게 그러한 것으로 인지되지 아니한다. 그것은 바로 대상화되기 어려운 삶의 세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러한 지평이 형성되는가? 보다 의식적인 차원에서 인문과학자들의 학문적 노력의 하나는 이 지평을 구성하는 일이다. 또는 이러한 지평은 구성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삶의 근본에 대한 해석의 역사로서 자연스럽게 존재하게 된다고 할 수도 있다. 그것이 지나치게 성급한 체계적인 작업이 되면, 그것은 이데 올로기를 만드는 작업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이러한 노력 또는 작업에 선행하여야 할 과제는 현실의 부름에서 한발짝 물러서서, 이 지평을 지평으로서 포착하려는 반성적 노력이다. 그러나 이 지평을* 2008년 중앙대학교 아시아인문학자대회 그리고 2011년 4월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에서의 강연 원고를 개고한 것임.
완전히 의식의 전면에 가져오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그리고 그것을 너무 쉽게하는 것은 삶 자체에 대한 반성적 노력을, 방금 말한 바와 같이, 이데올로기화하는 일이 된다. 릴케는 『두이노 비가』에서, “세계는 마음 이외의 다른 곳에 존재할 데가 없다”고 하고 “지구는 언제나 사람의 내면에 태어나기를 원한다”고 말한 바 있다(Duineser Elegien, 7 u.9). 모든 세계 그리고 지평이 결국은 사람의 마음 속에 존재한다고 한다면, 그것을 그러한 것으로 의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유가(儒家)에서 불교의 반성적 노력을 비판하면서 마음으로 마음을 잡으려하는 것은 자기 눈으로 자기 눈을 보고 자기 입으로 자기 입을 물려는 것과 같다고 한 것도 이러한 어려움을 말한 것이다(성백린, 2002: 365-367). 마음의밖으로 나가는 것은 거의 세계의 밖으로 나가는 일이다. 사고와 행동 그리고 상상의 테두리로서의 지평은 우리가 서 있는 자리이고 또 그러니만큼 적어도 우리가 서 있는 관점에서는, 모든 것에 대하여 열려 있는 보편성의 지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