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이시재(성공회대학교 NGO대학원)

하나의 물음으로 이 글을 시작한다. 왜 유독 근대일본만 서양의 음식문화를 받아들여 카레라이스, 돈가스, 고로케와 같은 일본의 ‘화양절충(和洋折衷)요리’를 만들어냈을까? 중국은 17세기 이후 신대륙으로부터 지금까지 많은 새로운 음식 재료를 도입하였지만, 그것들을 대부분 중국요리의 시스템 속에서 소화하였다. 태국도 새로운 음식 재료를 외국에서 많이 도입하지만 그것들을 활용하는 선에서 태국 요리를 발전시켜왔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던 인도차이나에도 서양요리는 정착하지 못했으며, 일본과 같은 절충요리도 발달하지 못했다. 또한 한국에서는 서양의 음식 재료가 좀처럼 정착하지 못하고 있으며 일본과 같은 서양음식과의 절충요리를 만들어내지 못하였다. 한국의 음식문화도 멀리는 중국에서, 가까이는 일제강점기를 통해 일본에서 많은 것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한국도 양배추, 양파, 당근, 샐러리, 토마토 등 서양의 채소를 받아들였지만 한국요리에 이를 통합하지 못하였으며, 버터, 치즈, 우유와 같은 유제품도 한국요리와 잘 맞지 않는다. 이 글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 나선다. 그 과정에서 일본 화양절충요리의 형성과 발전과정에서 드러난 특징을 분석하고자 한다.

메이지유신(1867년) 이후 일본은 서양요리, 서양 식자재의 수입에 열광하였다. 1871년 11월 메이지 천황의 생일파티에 프랑스 요리가 처음 등장한 이후 지금까지 외교사절을 맞이하는 일본의 공식만찬은 프랑스 요리로 정해져 있다. 일본은 메이지 이전 오랫동안 육식을 금해왔기 때문에 고기가 중심을 이루는 서양요리의 도입은 음식문화에 있어 대전환을 의미하였다. 육식 도입에 대하여 천황은 외교사절단이 일본의 음식을 먹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이를 배려한 것이라는명분을 내세웠지만, 일본인 각료만을 초대한 만찬에서도 프랑스 요리를 내놓았다. 그 후 일본의 정부, 지식인, 기업인 등 상층 엘리트들이 일제히 서양요리를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서양요리의 대중화, 일반 중산층의 서양요리에 대한 수요가 맞물려 메이지 말기(1910년경)에는 서양요리와 일본요리의 적절한 조합으로 화양절충요리가 완성되었다. 근대일본에서 창안된 이러한 화양절충요리는 식민지 지배를 통해 한국에도 전달되어, 카레라이스, 돈가스 등은 널리 보급되어 있다. 이 연구에는 일본의 화양절충요리가 한국에 전달되는 과정은 포함하지 않았지만, 한국에서 즐겨먹는 이러한 요리들의 뿌리를 찾는다는 의미는 포함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