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박이문 (시몬스대학교 명예교수)

3세기 전부터 근대 과학 기술 문명이 유럽에서 동북아시아로 이동하기 시작했고 그러한 흐름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문명의 흐름은 서양의 영향이 동북아시아로 미치고 있음을 뜻하고, 문명의 중심이 서양에 있음을 뜻한다. 문명의 이러한 판도는 유럽인들에 의한 근대적 의미의 과학적 지식 양식과 기술 능력의 개발에서 찾을 수 있다. 앎은 곧 힘이며, 서양이 개발한 과학이라는 앎의 양식은 가장 큰 실천적 힘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양의 과학 기술 문명과의 접촉으로 잠을 깬 동북아시아는 타의적으로나 자의적으로 지난 두 세기, 아니면 한 세기에 걸쳐 서양의 과학 기술 문명을 흡수하는데 열중했고, 21세기 초반인 오늘날 우리 모두는 서구의 선진국들과 상대해서 경쟁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런 점에서 세계 문명의 중심은 역전되어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역전되어 가는 문명의 흐름에 대해서 서양은 자기 연민과 허탈감에, 동양은 자화자찬과 오만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두 가지 생각과 태도는 모두 잘못이다. 지구가 하나의 세계라면 모두가 가까이 살 수밖에 없고, 또한 인류는 환경 오염, 핵전쟁, 생태계 파괴, 지구 온난화, 기아 등 문명의 총체적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이런 문명사적 위기의 원인은 서양이 발명하고 이제는 동양이 기꺼이 추종한 과학 기술의 필연적 결과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과학 기술 문명을 거부하고, 그런 문명의 틀을 만든 서양 문명을 거부하고 동양의 전통적 문명으로 돌아가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오늘날 과학적 사유와 힘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어떤 인간 사회, 어떤 개인도 생존할 수 없다. 문제는 과학이 아니라 과학의 잘못된 활용이며 그 잘못은 서양의 잘못된 인간중심적 세계관에 있다. 오늘날의 문명사적 문제는 서양의 인간중심적 세계관을 동양의 생태친화적 세계관으로 대체하여 그 테두리 안에서 과학적 지식과 기술을 활용할 때 해결될 수 있다. 우리의 문제는 동/서 문명의 우/열, 과학의 내재적 선/악을 따지는데 있지 않다. 우리는 인류 문명의 지속적 발전을 위하여 소승적이 아니라 대승적 관점, 즉 동양인/서양인의 구별을 초월한 인류의 관점에서 위기에 처한 문명을 구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