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유럽 각국에서 다문화성의 정치화와 문화적 갈등의 증폭이 유럽통합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진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 문제에 주목하는 이유는 다문화사회의 위기로 표현되는 사회적 변화가 앞으로 유럽통합의 과정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다문화사회의 갈등에 대응하는 방식에 따라 하나의 정치적 거버넌스 단위로서의 EU의 작동 양상, 정체성, 정당성 등에 변화가 초래될 수도 있는 것이다.
과거 유럽통합이 엘리트 프로젝트로서 일반대중의 호의적 무관심이라는 여론 환경 속에서 진행되어 왔다면, 1991~1993년 마스트리히트 조약의 체결과 비준과정을 겪으면서 유럽통합은 더 이상 엘리트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대중들의 지대한 관심의 대상이자 회원국 국내정치 차원의 중요한 쟁점이 됐다. 정치인과 관료, 기업인들의 담론 세계에서 주로 머물고 있던 유럽통합의 이슈가 대중정치의 장으로 진입하는 거시적 변화가 나타났던 것이다. 일반 대중이 유럽 이슈를 둘러싼 담론의 장에 참여하면서 나타난 새로운 현상 중 하나는 과거 유럽통합의 주된 동력이 경제적 이익 구현을 위한 노력에서 도출됐던 것과 달리 이제는 정체성의 문제가 유럽통합의 과정에서 중요한 작용을 하게 됐다는 점이다. 거버넌스란 효율성을 추구하기 위한 제도적 디자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구성원들의 정체성의 집합적 표현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사실 새로운 거버넌스의 등장으로 볼 수 있는 유럽통합의 과정에 정체성의 문제가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