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 이후 일제 식민통치에서 벗어난 한반도에는 ‘해방의 공간’과 ‘점령의 시간’이 펼쳐졌다. 탈식민으로 들끊던 한반도에 진주한 미군과 소군 은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북을 각각 분할점령했다(정용욱, 2018). 연합군으로 일본군과 함께 싸웠던 미·소는 1947년부터 세계를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라는 양극적(兩極的, bipolar) 냉전질서로 분할해 나갔다. 지구적 냉전(global cold-war)과 맞물려 냉전의 최전선(最前線) 한반도에서는 1948년 남과 북에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 적대적인 분단정부가 수립됐다. 1950년 6월 25일 탈식민과 냉전, 그리고 분단이 교차하던 한반도에서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양극적 냉전질서는 한반도에서 발발한 열전(熱戰)으로 더욱 견고해지는 듯했다. 그런데 한국전쟁 이후 적대적인 양극적 냉전의 한쪽 편에 서기를 거부하며 ‘반식민(反植民)·평화·중립’을 주창하는 새로운 세력이 등장했다. 어느 진영에도 가담하기를 거부한 세력의 상당수는 식민지에서 갓 벗어난 신생 독립국들이었다. 1955년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열린 냉전 시기 최초의 아시아·아프리카 회의는 반식민·평화·중립을 지향하며 냉전의 이분법적 편가르기를 거부하는 ‘제3세 력’의 집단적·조직적 현실화였다. ‘제3세력’을 주도하는 ‘중립국’들에 대해 1957년 남·북한 정부는 공히 동남아시아·중동·아프리카 지역에 새로운 대외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남한과 북한은 왜 1957년 ‘중립국’들과 외교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을까? 그리고 남·북한은 실제 어떠한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했으며 그 성과는 어떠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