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5세기에 중앙아시아에서 서아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차지하였던 티무르조의 역사서에는 주로 정치사, 전쟁사 관련 내용이 많고 사회·경제사 관련 기록은 적은 편이지만, 간혹 특정 사건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사회·경제사 관련 기록을 발견할 수 있다. 그중에는 당시의 물가에 관한 정보가 있다.
그분께서는 주마다 알 아왈 월 4일에 헤라트에 도착하였다. [중략] 그 나날에 후라산에서는 기근이 발생하였는데, 과거에도 이와 같은 상황은 나타난 적이 없었다. 특히 헤라트에서는, 기준 무게(Wazn-i Shari’)로 1만(Mann)의 밀가루가 250미스칼이었는데, 2미스칼의 순은(Tamam ‘ayar)인 3디나르-케베키(Dınar-i Kibakı)에 달하였다. 샤루흐(Shahruh.)는 명하기를 “창고를 열어 1만의 곡식을 1디나르-케베키의 가격으로 사람들에게 주어라.”라고 하였다(Samarqandıˉ, 1996~1997: 60).
위의 기사는 티무르조의 물가와 관련하여 종종 인용되는, 사서 『양성의 상승과 두 바다의 만남(Mat.la’ Sa’dayn wa Majma’ Bah.rayn)』의 1406년(이슬람력 809년) 기록이다. 이처럼 국내의 상황이 좋지 않아 물가가 폭등하였다는 기록은 티무르조의 사서에 여러 차례 등장하는데, 이러한 기록은 당대의 심각성을 독자들에게 보여 주기 위한 장치이거나, 군주의 정의로운 조치를 통해 물가가 안정되었음을 강조하기 위한 수사적 서술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러한 기사에서 당시의 상황을 보다 정량적으로 읽어 내기 위해서는, 당대의 도량형과 화폐단위에 관한 이해가 필요하다. 페르시아 문화권 고유의 무게 단위인 ‘만(Mann)’과 아랍-이슬람의 무게 단위인 미스칼(Mithqal), 거기에 일한국 가잔 칸(Ghazan Khan)의 개혁을 통해 생겨난 ‘표준-만(Mann-i Shari’)’에 이르기까지, 등장하는 단위 하나하나가 고유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시대 및 지역에 따라 변하기 때문이다.
또한 위 기사에 나타난 화폐단위는 티무르조의 이전 왕조, 차가타이한국의 케벡 칸이 고안한 것으로 알려진 은화 ‘디나르-케베키’인데, 그 무게가 ‘3디나르-케베키 = 순은 2미스칼’이라고 되어 있어 ‘디나르-케베키’라는 은화의 순도와 무게를 비교적 명확히 밝히고 있다. 그런데 이 기록에는 두 가지 맹점이 존재한다. 하나는 티무르조의 여타 기록에는 디나르-케베키의 무게가 위의 기록과는 전혀 다른 값이라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현존하는 티무르조의 화폐에 관한 여러 카탈로그를 검토해 보면, 인도에서 기원한 ‘탕가(Tanka)’라는 화폐가 대부분이며 ‘디나르-케베키’라는 이름을 지닌 화폐는 티무르조 초기의 혼용시기를 제외하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전술한 사료의 기록처럼 티무르의 아들이자 3대 군주인 샤루흐 시기에 디나르-케베키가 티무르조에서 통용되었을지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