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혁명 이후 자본과 군사를 근저로 한 세계화는 다른 의미로 서구화였다. 구미 열강은 그들이 설정한 근대 문명의 이식이라는 시대적 과업을 수행하며, 진보하는 세계에 대해 청사진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나 군사적 낙관주의의 팽배 속에서 각국은 군비증강을 지속하였고, 결국 대규모 무력충돌인 제1차 세계대전(이하 1차대전)이 발발하였다. 전시체제 속에서 각국의 구성원들은 국익을 위해 단합하며 맹목적인 충성을 행동화하였고 종국에는 전쟁의 도구로 소모되었다.
제국주의 발원지인 유럽이 주전장이라는 점, 총력전 개념의 탄생과 첨단 무기체계의 실험장이라는 점에서 전 세계는 1차대전의 경과에 이목을 집중하였다. 특히 동아시아 역내 영향력 강화를 갈망하였던 일본은 1차대전을 국익 극대화를 위한 호기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한편 식민지 조선과 중국의 민족해방운동가 및 지식인들은 당대 현실에 영향을 미칠 중대 사건으로 이를 인식하며 추이에 관심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일본이 경험한 1차대전에 대해서는 전쟁이라는 특성상 군사 및 외교 분야에서 활발히 연구가 이루어졌다(永井煥生, 1998; 도베, 2003; 후지와라; 조성윤, 2010; 박완, 2013; 김춘식, 2013; 최아진, 2014). 대표적으로 심호섭은 총력전쟁 수행을 위한 국가적 대비와 군 근대화를 통한 무기체계 개발이 1차대전의 교훈이었음에도 이와는 반대로 전략적 ‘단기결전’과 전술적 ‘백병돌격’을 추구할 수밖에 없었던 일본 육군의 상황을 분석하였다(심호섭, 2013). 또한 신효승은 1차대전을 계기로 『제국국방방침(帝國國防方針)』이 개정되었으며, 시베리아 완충지대 형성을 고려한 후방지역 안정화 차원에서 간도 침략이 자행되었음을 논증하였다(신효승, 2018). 정상수는 영국과 독일의 사료에 기반하여 일본의 칭다오 점령과 태평양 일대 독일 식민도서 장악을 분석하였으며, 과격한 일본의 대외정책이 영일동맹을 해제시켰고 끝내 진주만 공습으로까지 이어졌다고 주장하였다(정상수, 2013). 이들 연구는 1차대전을 기점으로 일본의 전략 및 전술의 변화 양상을 고찰하고 참전 배경과 전투 경과를 세찰하였다는 점에서 연구사적 의의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