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정근식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1998년 4월, 제주도에서는 4·3 사건 50주년을 기념하는 국제학술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는 50년간 침묵 당해온 4·3 사건의 진상규명을 국제적 연대의 힘을 빌려 정부와 사회에 호소하고, 또한 진상규명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제주도 주민에게 심어주는 의미 있는 모임이었다. 이 회의는 제주 사회에 내장된 공동체적 생명력을 바탕으로 하여, 광주의 5·18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운동이 달성한 국내 민주주의 지형을 탈냉전의 에너지로 확장하고, 보다 구체적이고 미시적인 전략을 새롭게 창출한 탈오명화의 장이기도 했다. 국민국가 형성기의 ‘냉전적 적 만들’(Robin, 2001) 결과로 형성된 집단 오명을 극복하기 위해 ‘한국에서 동아시아로’라는 규모의 변화와 ‘좌/우’라는 이분법적 이념 지평의 재구성이 필요했고, 이를 위한 전략적 개념이 ‘동아시아의 평화와 인권’이었다.
이 회의에서 1948년 4·3 사건과 비견되는 타이완(臺灣)의 2·28 사건과 오키나와의 전쟁 경험이 처음으로 소개되었고, 이들을 관통하는 냉전 형성기의 역사적 사건들을 ‘국가폭력’으로 개념화했다. 그러나 4·3 사건을 국가폭력과 연관시키는 담론은 비록 이 시기가 김대중정부 출범 직후라는 민주주의 상승기라하더라도 상당한 정치적 부담이 있었으므로, 우회로로서의 문학적 상상력과 국제적 연대의 힘이 필요했다.